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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말 이성계의 등장- 이성계의 군사활동과 세력확장, 이성계의 위화도회군과 여진족 이지란-3

by #€£¥¥++ 2022. 5.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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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이성계 군사활동과 정치적 성장

1) 이성계 군사활동과 세력확장

그렇다면 이성계의 군사활동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이성계가 신흥 무장세력으로 자리잡기까지의 과정을 살펴보겠다.

이성계는 공민왕 5년(1356) 중앙에 진출하였다. 그가 중앙에 진출 할 수 있었던 것은 개인기량이라기보다, 그의 아버지 이자춘이 쌍성총관부를 수복하는 데 공헌한 바에 힘입음이 컸다. 이성계가 직접 군사를 이끌고 활동하는 기록은 공민왕 10년(1361) 이자춘이 죽고 난 이후에야 확인된다. 이성계의 공식적인 군사활동은 강계만호 박의(朴儀)가 일으킨 반란을 진압하기 위하여 친병 1,500명을 이끌고 출전하면서이다. 이성계의 직함은 금오위상장군(金吾衛上將軍)·동북면상만호(東北面上萬戶)였다(태조실록1 총서 공민왕 10년 9월). 이성계가 중앙에 진출한 지 5년만에 이런 높은 벼슬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선대부터 동북면에 기반을 둔 군사집단의 힘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성계의 군사 활동은 몇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다.
공민왕대에 이성계의 군사활동은 동북면과 깊은 연관을 가지고 있다.
이성계의 군사활동은 원 세력의 축출이나 원에 복속되었던 고려인을 다시 고려에 복귀시키는 임무에 치중되었다.
물론 이 점은 공민왕대의 반원정책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
또한 이성계가 홍건적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개경에 출동한 적이 있기는 하지만, 그의 주된 활동 반경은 서북면의 국경 지대나 요동 지역이었다. 그는 동북면을 거점으로 한 사적인 세력을 인정받을 수 있는 상황에 있었던 것이다.

공민왕 10년 홍건적이 서북면을 침략하고 이어 개경에 이르자 이성계는 휘하 2,000명을 이끌고 이들에 대항하였다. 이성계가 홍건적의 방어를 위하여 출전한 사이 동북면의 북청, 홍원 등에 조소생(趙小生)과 나하추(納哈出)가 침입하였다. 조소생은 쌍성총관이었던 조휘의 후손으로 원과 밀착하여 동북면에서의 지위를 회복하려 하였다. 고려는 이성계의 군사집단이 참여하지 않은 상태에서 나하추의 침입을 방어하기 어렵게 되자 이성계에게 동북면병마사의 직위를 주어 방어하도록 하였다(『태조실록』1 총서 공민왕 11년 2월).

이는 이자춘에게 그랬듯이 동북면에서 이성계의 사적인 지위를 고려정부가 공식화하여 동북면을 고려의 통제권 안에 두려는 의도를 보였다고 할 수 있겠다.
이후에도 이성계는 동북면에 침입하여 오는 여진인이나 왜구를 방어하고 있으며, 최유의 침입에 대응하고 동녕부 공략에 참여하였다. 특히 공민왕 13년 최유가 덕흥군(德興君)을 왕으로 앞세우고 공민왕을 폐하고자 압록강을 넘어 침입했을 때에는 최영(崔瑩)이 총책임자가 되어 방어하였다. 이성계는 동북면에서 1,000여 명을 이끌고 참여하였는데, 고려 장수들과 마찰이 생겨 이성계 혼자 전투에 전면으로 나섰다고 한다.

이 후 이성계는 정치적 태도로 사람들을 대하기 시작하였다고 생각된다. 이성계는 휘하의 군인을 셋으로 나누어 대적하였는데, 다른 두 부대는 이자춘을 따르던 사람이었다고 한다. 이는 바로 이성계 휘하의 장수들이 선대부터 이성계 가문에 예속되었던 사람들이며, 그 휘하 일반 군인도 그러할 것이라고 추측된다.
이성계의 활동이 중국과의 국경 지역에서 이루어지다 보니 국내 중앙정계에서의 지위확보나 영향력은 그의 군사활동 성과에 미치지 못할 정도였다.

공민왕 13년 이성계가 최유의 침입에 대적하기 위하여 서북면에 가 있는 동안 이성계와 인척간이었던 삼선(三善)과 삼개(三介) 등이 여진인과 함께 영흥 이북지방을 함락하였는데, 이성계가 다시 이를 수복한 공로로 밀직부사(密直副使)에 임명되고 공신(功臣)에 책봉되었지만 중앙정계에서의 영향력을 확보 한 것은 아니었다(『고려사절요』28 공민왕 13년 2월).

이성계가 동북면원수(東北面元帥)로 임명되고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에 오른 공민왕 18년에도 그의 지위 상승은 동녕부 공격을 위한 것이었다. 이성계의 군사활동 성과는 중앙정계에서의 영향력 증대로 이어지지 못하였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성계가 고려정부로부터 군사력의 힘은 인정을 받되 이성계의 출신과 관련하여 생각해 볼 문제라 생각된다

공민왕 13년 이후 중앙정계에 진출하기 시작한 이성계는 출신과 관련하여 정치적 활동에 제약을 받았으며 그것을 타개하기 위해 신천(信川) 강씨(康氏)와 혼인관계를 형성했다고 생각한다. 이성계는 선취(先娶) 신의왕후(神懿王后) 한씨(韓氏))가 생존하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신덕왕후(神德王后) 강씨를 후취(後娶)로 맞아들였던 것이다.

이성계의 신천 강씨와의 혼인은 앞서 안변(安邊) 한씨와의 혼인과는 달리 그의 정치적 성장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된다. 신천 강씨는 공민왕 5년의 반원정책이 단행되기 이전까지는 부원세력(附元勢力)으로서, 신덕왕후 강씨의 가족들은 그런 관계에서 높은 지위에 있었으며 이 후 공민왕의 반원정책으로 인해 치명적 타격을 입었지만, 홍건적의 침입 이후 어느 정도 가세를 회복할 수 있었으며 공민왕이 입어(入御)할만큼 큰 경제적 기반을 소유하고 있었으니, 이처럼 고려의 중앙 정계에 상당한 기반을 지녔던 강씨 일족과의 연결은 동북면 출신으로 이성계의 선택이었다고 보여진다.

한편 이성계는 신덕왕후와의 혼인을 통하여 영산(靈山) 신씨(辛氏)와 혼인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는 점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특히 강씨와 마찬가지로 주요 부원세력이었던 신씨와 인연을 맺게 되면서 이성계는 신돈집권기를 통해 그 세력 성장에 큰 도움을 받았을 것이다.

여기서 더욱 주목되는 것은 신돈집권기의 상당기간 동안 이성계의 행적이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태조로 즉위하기 이전 이성계의 기록은『태조실록』의 총서와 『용비어천가』, 『고려사』에 풍부하게 나타나고 있지만, 공민왕 13년 2월 삼선과 삼개의 전투 이후부터(『고려사』권 40, 공민왕 13년 정월.)
공민왕 18년 12월 동북면원수로서 동녕부정벌에 출정하면서 다시 등장하기까지(『고려사』권 28, 공민왕 18년 12월) 5년 10개월 동안 이성계의 동향은 전혀 기록이 없다. 그동안 이성계가 어디서 어떤 활동을 했는지조차 전혀 알 수 없을 정도로 모든 관계 기록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조선을 건국한 태조로서의 이성계의 다른 시기의 상세한 기록과는 지극히 대조를 이루는 현상이라 볼 수 있다. 아마도 이 기간동안 이성계는 신씨 일족의 비호 하에 활동을 하였고 그것이 이성계 정치적 성장과 직결되는 것이었던 만큼 그에 관한 기록을 고의로 인멸시켰음이 분명하다. 신돈집권기를 부정적으로 파악함으로써 조선 건국의 정당성을 강조하려는 입장에서 신돈과 관계되는 이성계의 기록을 역사서술에서 아예 배제하여 서술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최영을 비롯하여 대다수의 무장들이 신돈집권기에 제거되었지만 이성계만은 아무런 제약없이 활동할 수 있었던 점에서 더욱 신빙성이 있을거라 생각된다.

이후 이성계의 행적은 신돈집권기 말기인 공민왕 19년의 동녕부정벌에서 공을 세우면서 다시금 기록에 등장한다.
동녕부정벌에 관계되었던 인사들이 모두 신돈집권기에 어느 정도 협력하였던 세력임을 볼 때 이성계가 확실히 신돈과 관련된 세력이었음은 분명하다.

공민왕 20년(1371) 7월, 신돈이 제거되면서 6년 2개월여에 걸친 신돈집권기가 끝났고 이에 축출당하였던 최영 등의 세력이 재기용되면서 이성계도 앞서 말했듯이 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를 제수받아 재신(宰臣)의 지위에 오르게 되었다.(『고려사』, 권43, 공민왕 21년 6월)

신돈집권기에 제거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정치적 성장까지 보았다고 여겨지는 이성계가 신돈이 몰락하고 신씨 일족도 몰락하는 시기에 재신의 지위에 오를 수 있었던 배경은 공민왕의 이성계에 대한 총애와 동녕부정벌에서 세운 전공, 그리고 이성계의 무력집단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할 수 있었던 데에는 신덕왕후와의 혼인을 통해 기존 가별초세력의 경제적지원과 신돈집권기와 그 이후 정치적 성장에 큰 도움을 받았다고 추측해 볼 수 있다.

공민왕대와 우왕대의 이성계의 정치적입지는 상당히 차이가 있는데 우왕대 이성계가 왜구와 벌인 전투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것은 우왕 6년 운봉지역에서 벌어진 전투다(『고려사절요』 31 우왕 6년 8월).

황산대첩(荒山大捷)이라고 불리는 이 전투에서 이성계는 대승을 거두었다. 3도의 군인들이 참여한 대규모 전투였는데, 여기에서 가장 성과를 올린 군인은 바로 이성계 휘하였다. 이성계 휘하 군사집단의 지휘관이었던 이두란, 처명(處明) 등이 공을 세웠다(『태조 실록』1 총서 우왕 6년). 특히 이두란은 편장으로 이성계를 보좌하며 전투를 지휘하였다.
당시 이성계가 최고지휘관으로 모든 군을 지휘하였으나 전투 중에 이성계가 직접 거느리고 싸운 군사는 역시 자신의 직속 휘하 군사였다.

황산대첩 이후 이성계에 대한 중앙의 인식에 또 다른 변화가 있었으며, 특히 우왕과 최영 등이 이성계의 전공을 높게 사게 되었다. 이성계가 중앙에서 가장 커다란 군사적인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던 최영과 밀접한 관계를 형성하게 된 것도 황산대첩이 계기가 되지 않았나 생각된다.

우왕 8년(1382)과 9년에는 동북면 단주에 침입한 여진인 호발도(胡拔都)를 물리치기 위하여 이성계가 출전하였다. 전황이 불리하자 이성계는 상중(喪中)에 있던 이두란을 불러내 싸우도록 하였다(『태조 실록』1 총서 우왕 8년 7월, 9년 8월).

이두란은 여진인 출신으로 여진인의 전술에 밝았다는 이점도 있었지만, 이두란과 그 휘하 군사력이 필요하였기에 불러냈을 것이다. 또한 육여와 황희석이 이 전투 이후 이성계 휘하에 들어오게 되었으며(육여와 황희석은 조선 건국 이후 원종공신(原從功臣)에 책봉되었다. 황희석은 이후 개국공신으로 추가 책봉되었다), 귀환길에 안변에서 김인찬(金仁贊)과 한충(韓忠)도 휘하에 들어오게 된다. 한충과 김인찬은 이후 조선 개국공신으로 책봉된 인물들로 안변의 토호였다.
이렇게 이성계는 더욱 동북면의 세력을 확장해 나갈 수 있었다.

요컨대 공민왕대에는 원과 관련된 세력을 축출하는 데 이성계의 군사력이 집중되었다. 이 과정에서 원에 편입된 고려인이나 여진인, 원나라 유민을 고려의 통치 아래 두어야 하는 과제가 발생하였고, 이는 동북면을 거점으로 하고 있던 이성계의 새로운 인적공급을 가능하게 하였다. 이로써 자신의 선대로부터 내려온 세력과 공민왕대 새로 편입된 세력을 장악하여 군사력을 확대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였다.

한편 우왕대 이성계의 군사활동은 공민왕대 형성한 군사력에 기반을 두고 이루어졌다. 이성계의 군사활동이 동북면은 물론 전라도 일대에까지 이루어져 행동 반경이 넓어졌다. 이는 이성계가 동북면에 거주하지 않고 중앙에서 활동하게 됨으로써 이루어진 것이다. 그는 다른 무장들과 함께 외적 방어에 동원되는 경우가 많아졌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상 자신의 휘하 군사집단에 대해서는 독자적인 지휘권을 유지하였다. 이는 공식적인 군대의 파견에도 불구하고 이성계의 사적 지휘권이 인정되었음을 보여준다.
이성계가문이 동북면 일대의 대표적인 세력가로서 세전되어 온 가별초집단을 유지하면서 군사력을 보유하고 이러한 군사집단의 사적인 결속력을 유지함으로써 이성계 가문은 다른 여러 장수들보다도 강한 군사력을 유지할 수 있었으며, 그의 군사집단을 형성하여 조선 창건에 이용하였던 것이다.

3.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과 이지란 그리고 동북면

우왕 14년(1388)에 단행된 이성계의 위화도회군은 조선건국으로 연결되는 도화선이 되었다.
이 사건으로 이성계는 일거에 정계의 실력자가 되었으며, 민망(民望)을 모으는 유력한 무장으로서, 개혁세력의 기대를 한 몸에 모으게 된다. 이지란이 이성계가 참여한 전투의 중요한 고비에서 든든한 무장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였음은 앞서 살펴본 바와 같다. 이지란이 여진족에서 고려로 투항한 귀화인이니만큼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는 결정적 계기가 된 위화도회군을 단행하는 과정에서 이지란은 어떠한 입장에 있었는지를 살피고자한다. 그럼으로써 이성계와 여진족의 관계를 조금 더 조명해볼 수 있을 것이다.

우왕 14년의 요동정벌은 두 가지 배경으로 촉발되었다. 명의 세공요구와 철령위설치문제이다.
특히 철령위설치문제는 당시의 고려 입장에서는 수용하기 어려운 조처였다.

공민왕 17년(1368)에 원의 정권은 중국에서 축출되고 주원장의 명왕조가 수립된 원명교체기에 공민왕은 반원친명정책을 사용하여 정식으로 명과 외교관계를 맺었다.(『고려사』권46 공민왕 18년 4월)

공민왕 사후 우왕이 즉위한 이후 고려와 명과의 외교관계는 순탄하게 전개되지 않았다.
우왕 원년(1374) 우왕은 사신을 명에 파견하여 전왕시호(前王諡號) 및 신왕승인(新王承認)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명나라 사신이 귀국 중 살해되면서 우왕의 사신은 입국을 거부당했다.

당시 실권자인 이인임(李仁任)은 원명 모두에게 사대(事大)를 취하는 이중 외교정책을 채택하였다.
원명 양국을 견제하면서 우왕의 왕위계승을 정당화 시켜 자신의 집권기반의 안정을 꾀하려 하였다.

그리하여 고려는 북원에 통교(通交)하여 우왕3년(1377) 북원으로부터 공민왕 시호(孝敬大王)와 신왕(禑王)의 책봉을 받았다.

우왕 11년(1385) 명은 우왕을 고려국왕으로 책봉하고 공민이라는 전왕시호를 승인하는 동시에 사신을 파견하였다.
그리하여 고려 양국 간의 정상적인 국교관계가 재개되었다. 그런데 우왕 12년(1386) 명에서 세공을 요구하면서 앙금이 맺히기 시작하였고 최영은 요동선공을 주장하였다.

우왕 13년 명은 나하추를 평정한 후 요동경영에 크게 관심을 가지는 동시에 고려에 대하여 더욱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철령위설치를 고려에 통보하였고, 고려에서는 탁청과 조휘의 배반으로 원에 귀속된 바 있지만 고려의 원래 영토임을 주장하면서 철령위설치의 부당성을 역설하였다.
고려의 외교적 노력에도 불구하고 우왕 14년, 명은 철령 이북, 이동, 이서의 땅은 원조에 소속하였던 땅이기 때문에 명에 귀속되어야 하며, 모두 요동에 귀속시킨다는 것이었다. 명이 원에서 쌍성총관부를 설치하였던 철령이북, 즉 동북면의 할양과 그곳의 거주민인 여진과 고려인 등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였던 것이다. 이어 명은 강계지방에 경계표를 세우고 철령위설치를 시도하였고 고려정부에 그 사실이 보고되었다. 이로써 우왕은 최영과 더불어 명의 행동에 대응하여 전국에 동원령을 내리고 요동정벌의 결정을 표명하였다.

우왕과 최영의 요동정벌에 이성계가 사불가론(四不可論)을 제출하였지만 거부당했고 최영의 요동공격의 목적은 명의 고압적인 태도를 파쇄하고자 함이었다

이성계가 주장한 사불가론의 내용은 이렇다.
첫째, 작은 나라인 고려가 큰 나라인 명과 대항하면 이길 수 없다는 이유로, 이것은 국가보전의 양책이 아니라는 주장이다.  
둘째, 더운 여름에 군사행동은 불리하고 여름은 농경계절이므로 농민의 지대를 받기 어렵다는 내용이다. 또한 당시 고려의 전제문란(田制紊亂) 군량과 무기의 부족 등의 문제를 제기하였다.  
셋째, 전국적으로 대군을 원정하면 왜구가 그 허함을 타서 침입한다는 근거였다. 왜구침입의 빈번함으로 요동으로 출병하면 반드시 왜구는 다시 침범할 것이라고 우려하였던 것이다.  
넷째, 여름인 장마철에 병기를 쓰기 힘들고, 전투하기에 어렵고, 군대가 전염병에 감염되는 것등으로 병사들이 희생될 우려가 있다는 것이었다.

현실적으로는 신진사대부 계층의 이해와 직결된 제언으로 파악되고 있다.

우왕 14년 팔도도통사 최영, 좌군도통사 조민수, 우군도통사 이성계 등이 서경에서 진군하였으며 이지란이 조전원수(助戰元帥)로 예속된 우군은 이성계의 친병이 주력인 정예부대였다. 우왕 14년 5월 고려군은 압록강의 위화도에 도착하였는데 장마로 인하여 진군하지 못하고, 진중에 도망가는 병사가 많았다. 이로 인해 진중에 원성이 높아졌고 이성계는 조민수와 더불어 공격중지의 상소를 제출하였다.
우왕과 최영은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고 군을 독려하였고, 이성계는 진중에 회군론을 제시하였으나 조민수의 동의를 즉시 받지는 못하였다. 이에 고심하던 이성계는 이지란과 토의하게 되었고 이지란은 이성계의 정치적 상황을 고려하여 회군론을 지지하였다.

이지란은 이성계의 수하에 들어간 여타의 여진 추장과는 다른 인물이었다. 그는 이성계와 의형제 관계에 있었고, 공민왕 20년 고려로부터의 공식적인 귀화 이전에도 이성계와 긴밀한 연대를 형성하고 있었다.
이지란은 자제(子弟)와 같은 고려가 부모와 같은 명을 공격하는 것은 배은행위(背恩行爲)로 회군하여 고려의 국가안전을 실현하자고 권유하였다.
이성계는 위화도에서 회군을 결정하여, “명을 공격하는 것은 상국(上國)의 천자(天子)에게 죄를 범하는 것이므로 불가하다” 말하고 조민수, 이지란과 더불어 회군을 단행하였다. 그 후 이성계와 이지란이 개경에 도착하자, 이방우(李芳雨)와 이방과(李芳果), 그리고 이지란의 아들 이화상(李和尙) 등이 합류하였고 최영일파를 모두 숙청하였다.

이지란은 동북면 일대의 여진 및 가별초의 합류를 유도하면서 최영과 우왕의 세력보다 압도적인 군사력으로 세운 공으로 위화도회군에서 일등공신이 되었다.

이성계 가문은 앞서 살펴보았듯이 동북면지역에 관할권을 가지고 있었고 이지란을 비롯한 토착 여진 세력들을 가별초집단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성계 가문은 누구보다 원명교체기의 격변하는 동아시아의 정치 상황을 알고 있었다.
1387년 나가추 항복 이후 1388년 토구스 테무르칸 북원정권의 궤멸소식과 몽골 지배계층의 도미노적 투항등 소멸해가는 북원의 실상은 이지란 등 여진세력에 의해 이성계에게 낱낱이 알려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이지란을 비롯한 귀화여진족과 기존 가별초집단을 기반을 계승하면서 위화도회군에도 동북면의 여진세력들이 조선건국에 일익을 담당해 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논문형 글이며 필자가 작성, 편집한글입니다
-사료비판 환영하며 정상적인 토론환영합니다
-참고한 논문, 참고자료들이 있으며 인용하였습니다 (인터넷글이라 주석달기가 어려워 요청시 오픈합니다)
-기타 문제점들도 말씀해주시면 참고하겠습니다
-8개단락으로 나누어 작성된글이므로 모든 글들을 종합하여 봐주시기 바랍니다

가장 많이 영감을 얻고 참고한 자료는 윤은숙교수의 몽골제국의 만주지배사, 2010, 소나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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