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재테크💵/🎓Brain🎓

이성계가문의 조선건국과 북방민족 여진과의 관계, 이성계가문과 고려말 동북면 여진족의 실태 -1

by #€£¥¥++ 2022. 5. 13.
728x90
반응형

14세기말, 중국에서는 원·명교체가 이루어지고 있었으며 한반도에서는 고려·조선의 왕조교체가 이루어졌다. 그런 동북아시아의 정세속에서 이성계가문은 동북면에서 기반을 확충하고 세력을 강화시켰다. 이성계 가문은 원나라로부터 천호장 겸 다루가치의 지위를 세습하여, 고려인과 여진인을 지배했고 이들이 이후 조선왕조를 건국하는 기본 무력이 되었다는 것은 당연시되고 있다.  

그리고 1388년 5월의 위화도 회군은 북원의 내부사정을 잘 아는 이성계가 그 직전 북원의 기본 무력이 무너졌음을 파악한 데서 나온 14세기말 동아시아 국제정치 상황의 결과물이다.  
그런 가운데 이성계 가문의 기반이 주목되어 무력집단인 가별초를 국가의 간섭 없이 개인사병으로 이성계가 통솔하였음이 기존 연구들로 밝혀졌다.

이성계 세력의 군사적 성장배경이나 조선 건국 과정에 대해서 많은 연구가 있었는데 일본인 이케우치 히로시(池內宏)로부터 나오기 시작했다. 그는 이성계 선대에 대한 기록을 조작된 전설로 보아 『태조 실록』에 등장하는 4대조의 기록을 ‘가공의 전설’로 표현하면서 그 사실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권도경은 이성계집단이 한반도 동북방의 전통적인 여진족 거주 지역에서 여진족과의 정치적·군사적 헤게모니 다툼 속에서 성장하였으며, 이를 기반으로 조선 창업의 기반을 확보할 수 있었던 역사적 맥락을 통해 설명할 수 있으며,  

이성계 설화가 여진족을 대상으로 한 점은  
첫째로 조선건국의 대외적인 정당성확보이고,  
두 번째는 조선 건국의 신화적 합리화이며,  
셋째로 조선건국이후 여진족을 배제하기 위한 결과라 분석하였다.

조선왕조 개창자로서의 이성계의 세력기반 연구는 이후 그를 주축으로 하는 건국 주도세력에 대해 분석한 논고들이 주로 발표되었다. 조선왕조의 건국의 주도층에 대해서는 신흥 사대부를 중심으로 그들의 성장과 사상적인 기반에 대해서 관심이 집중되었고, 이러한 분석은 고려말 정치적·사회적 지위를 기준으로 조선의 건국세력을 파악하고 있으나  

이성계의 역할은 어느 정도 무시되고 정도전·조준 등의 신진사대부 주도하에 신흥 무장세력인 이성계가 참여하여 개혁이 진행되고 조선건국이 되었다고 파악하고 있다. 그러한 점에서 이성계 가문이 동북면에서 세력을 형성하는 과정을 구명한 연구는 그 의의가 부각된다.  
이성계 가문이 동북면에서 세력을 형성할 수 있었던 요인들을 동북면의 특수성과 시대적 상황에서 찾아보고, 아울러 그 특성 안에서 이성계 가문의 세력기반을 파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이성계의 군사적 기반에 주목해야 한다. 고려말 대표적인 신흥 무장중의 하나로, 이성계의 선조가 동북면 지역을 토대로 성장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하여 공민왕대에 중앙정계로 등장하는 배경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가 당시 계속 되었던 출전하면서 많은 전공을 세울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동북면 지역에서의 군사적 기반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성계 가문의 기반이 동북면 지역에서 형성되었다면, 당시 동북면 일대에서 토착 세력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었던 여진족들과의 연관성이 드러나야 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필자는 이성계가 여진족일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 주목하여 논고를 주장하고자 한다.  

이성계의 군단이 주로 여진족으로 구성되었으며, 여진족 족장 출신의 이지란과 이원경등을 원활히 통솔하여 고도의 응집력을 보여준 것은 이성계 본인의 특출한 능력이라고도 볼 수 있지만 이성계 가문의 내력, 즉 4대조인 이안사부터의 행적이 비로소 명확하고 그때부터의 행적은 여진족 군장을 연상시키는 모습을 갖추었다는 점, 『태조 실록』, 『용비어천가』등이 이성계가 여진족임을 추정받고 그것을 극구 부인하는 내용이 실렸다는 점에서 이성계는 여진족과 관련이 있는 여진족계통의 인물일 확률이 높다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이성계가문의 여말선초의 활동을 재고찰하여 여진족과 관련된 행적, 조선조 개창에 여진족의 역할들을 살펴보려 한다.

이성계 가문과 동북면 -고려말 동북면 여진족의 실태

1258년 12월 고려의 동북 변경지역인 和州(永興)에 원의 관부인 쌍성총관부가 설치되었으며, 이 관부의 설치로 고려는 동북면의 영토를 상실하였다. 쌍성총관부는 공민왕5년 7월 고려군에 의해 수복될 때까지 99년 간 존속하였다. 쌍성총관부의 관할 지역은 고려 정부의 통치력이 미치지 못하고 고려의 유이민과 여진인들이 섞여 살고 있던 곳이었다.

당시 원나라는 1350년대부터 황실 내부의 반목과 빈발한 내란으로 급속히 쇠퇴하기 시작하여 마지막 황제인 순제는 1368년 주원장이 이끄는 세력에게 수도를 내어주고 응창부로 도주하였다. 그로부터 북원시대가 시작되었고, 중원은 명의 통치 아래에 들어갔다. 원·명 교체기인 14세기 중엽부터 동북면의 대부분 지역은 실질적으로 어느 나라에도 속하지 않은 땅이 되었다. 원으로부터 만호·천호 등의 관직을 세습적으로 받았던 여진족의 추장들은 다수가 자발적으로 명나라나 조선에 빈번히 귀화하였다. 그러나 그 지역 전체가 어느 나라의 통치권에 귀속되었던 것은 아니었다. 다만 압록강과 두만강 이남 지역이 공민왕대로부터 우리나라의 영역에 속하게 되었고, 요동반도 등의 요녕성 지역의 일부가 통치권 내에 들어가게 되었지만, 그 밖의 지역은 17세기초까지도 각국의 중앙 정부의 통치력이 확실히 미치지는 못하였다.

고려의 동북계·서북계에 가까이 살면서 고려의 농경생활을 익힌 여진은 흑수지역을 포함하여 만주의 내지에서 다른 여진들과는 구분되었던 것이 확실해 보인다. 고려에서는 이들을 동여진이라 칭하였다. 조선측의 일반적인 사료에서는 당시의 여진족을 여진과 오랑캐·우디캐로 삼구분 하고 있는 것이 확인된다. 여진은 일반적인 민족의 명칭으로 통칭되기도 하나, 오랑캐나 오도리와 구분되는 명칭으로 쓰여졌다.
고려시기 두만강 일대를 중심으로 한 남만주 지역과 한반도의 동북면 일대에 산거하고 있던 여진족의 분포상황은 그 사료의 부족으로 상세히 알 수 없으나 『태조 실록』, 『용비어천가』의 여진 관련 기록에서 어느 정도 확인할 수 있다. 그들은 고려말 두만강 유역의 넓은 지역에 산거하고 있었으며, 두만강 이남의 함흥에서 갑산, 북청 등 평야지대나 해안지대에 걸쳐 있었다.
이들 지역은 후일 조선의 개척에 의해 조선의 영내로 복속된다. 이렇게 자리잡고 있던 여진인들은 공민왕대 경제적·정치적으로 국가적 우대정책에 고무되어 고려의 영내에 정착 영주하는 사례가 속출하였다. 고려에서는 이들 여진인들을 받아들임에 있어서 관용적이고 적극적인 자세를 취하기도 하였다.  
당시 쌍성총관부와 동녕부에 속해 있던 여진계가 귀화해오고 있었으며, 이들의 귀화는 고려가 존속하는 동안 계속되어, 조선시대까지도 나타난다. 고려에서는 귀화해 온 여진인들에게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 원거주지에 그대로 살게 하면서 군사적 역할로 이용하고자 하였다.
여진 귀화인의 구성을 보면 유민·포로가 많고, 다음으로 만호·천호·백호와 추장으로서 수하들을 이끌고 귀화해 오는 자들이다. 특히 공민왕대 이후에는 고려 전기와 비슷한 양상을 보이고 있어 군사적인 활동을 하던 자들이 그 우두머리와 함께 귀화해 오는 경우가 많았다.  

여진인 귀화 사례 중 가장 규모가 큰 것은 1370년(공민왕 19년) 이성계가 동녕부를 수복할 때 얻은 1만여 호를 들 수 있다. 이 무렵 이성계의 활약으로 특히 동북면 지역에서 많은 여진 귀화인이 있었는데, 이들의 귀화로 고려의 북방은 더욱 확대되었으며, 이들은 귀화한 후 이성계 휘하의 사적 지휘체계 아래에 속하게 되었다. 귀화한 여진인들을 고려 후기 이성계의 군사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그가 중앙정계로 등장 할 수 있게 하는 군사적 기반에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
여진 추장들은 대략 10호에서 500여호에 이르기까지 그들에게 사적으로 예속된 가별초(家別抄)를 거느리고 있었는데, 고려에서는 이들 여진추장들에게 은전(恩典)을 베풀어 필요하면 관직을 내려, 관하인을 추장들에게 일임하여 관하인의 국역을 면제시켜 주었다.  

이리하여 여진 추장들은 그 관하인을 노예처럼 사역하였다. 이와 같이 동북면 일대에는 고려말에서 조선 초기에 이르는 동안 대다수의 여진 추장들이 사적으로 가별초를 거느리고 있었으며, 이들 여진 추장들은 자신들이 고려로 귀화하면서 가별초를 함께 거느리고 왔다.  
고려말 이성계가 군사활동을 통해 세력을 확장시키는 과정에서 수많은 여진인들이 포섭되었고, 그들이 소유하고 있던 가별초 집단은 이성계의 군사적 기반의 성장배경이 되었다.


-논문형 글이며 필자가 작성, 편집한글입니다
-사료비판 환영하며 정상적인 토론환영합니다
-참고한 논문, 참고자료들이 있으며 인용하였습니다
-기타 문제점들도 말씀해주시면 참고하겠습니다
-8개단락으로 나누어 작성된글이므로 모든 글들을 종합하여 봐주시기 바랍니다


가장 많이 영감을 얻고 참고한 자료는 윤은숙교수의 몽골제국의 만주지배사, 2010, 소나무입니다

728x90
반응형

댓글